'수수료 인상' 없는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주 5일 근무제' 실효성 논란만
정부가 12일 발표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알맹이' 빠지고 택배사 자율에 맡겨
[뉴스투데이=이지민 기자] 정부가 택배기사의 과로 방지를 위해 12일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주5일근무제' 도입이 핵심이지만 택배사들에게 '권유'하는 수준에 그쳐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택배기사 인력 충원과 배송 수수료 인상 등과 같이 노사간 입장차가 큰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 대안이 제시되지 않았다.
■ “주 5일제 도입 유도”...구체적인 로드맵은 없어/택배물품 분류 자동화 위한 정책자금 연 5000억원 이상 지원키로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날 합동으로 발표한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의 핵심 내용은 당장 시행할 수 있는 대책보다는 장기적인 정책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정책에서는 주 5일 근무제 도입 방안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배송량, 지역 배송 여건 등을 고려해 노사 협의를 거쳐 택배기사의 토요일 휴무제 등 작업체계 확산을 유도할 것”이라고만 밝히고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정부의 역할을 ‘유도’로 제한한 것은 택배사가 반발할 경우 주 5일제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택배기사 과로 방지에는 하루 작업시간 단축보다는 주 5일제를 통한 작업일수 단축이 더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루 작업시간의 경우 정부는 택배사별 여건에 따라 작업시간 한도를 정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현재 택배기사의 일평균 작업시간은 12.1시간에 달한다. 주 6일 근무제를 고려하면 주당 작업시간이 72시간을 넘는다는 얘기다.
정부는 택배기사의 분류, 집화, 배송을 포함한 하루 작업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가능한 예로 제시했다.
문제는 택배 물량의 증가 추세를 고려할 때 인력 충원 없이는 현실적으로 택배기사의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정부는 이날 택배기사 인력 충원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다음 달 구성될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 협의회’의 논의 과제로 남겼다. 협의회는 택배기사와 택배사 단체뿐 아니라 소비자 단체, 대형 화주, 국회, 정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기구다. 택배기사들이 과중한 업무의 주원인으로 지목해 온 분류작업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이날 명확한 지침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노사 의견수렴을 거쳐 분류작업을 명확화·세분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택배기사 1인당 분류작업에 드는 시간은 하루 3∼4시간에 달한다. CJ대한통운을 비롯한 일부 택배사는 최근 택배기사의 과로사로 추정되는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분류작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원 인력을 투입했다.
정부는 이날 택배기사의 작업시간 단축을 위한 인프라 확충과 자동화 설비 지원 방안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을 내놨다.
정부는 내년부터 도시철도 차량 기지와 공영 주차장 등 유휴 부지에 '공유형 택배 분류장'을 30곳 이상 지어 택배 배송 시간을 줄일 계획이다.
분류작업 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집화 터미널에서 소형 택배를 배송 지역에 따라 자동으로 분류해 행낭 묶음 단위로 포장하는 ‘MP’(Multi Point) 등 자동화 설비 도입을 위한 정책자금을 연 5000억원 이상 규모로 지원하기로 했다.
■ 배송 수수료 인상 위한 구체적 방안도 포함되지 않아
택배기사의 작업시간 단축은 배송 수수료 인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특수고용직(특고) 종사자인 택배기사는 근무시간으로 책정되는 임금이 아니라 배송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데 작업시간을 단축하고 수수료를 그대로 두면 소득 감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택배기사의 배송 수수료는 건당 800원 수준으로, 2002년(1천200원)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택배기사가 일정 수준의 소득을 유지하려면 배송 물량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8년 교통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택배기사 1인당 하루 배송은 177건에 달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날 발표한 대책에는 배송 수수료 인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포함되지 않았다. 수수료 인상 문제도 택배기사 과로 방지 대책 협의회의 의제가 될 전망이다.
다만 정부는 배송 수수료 저하를 야기하는 홈쇼핑 등 대형 화주의 이른바 ‘백마진’ 관행 등의 개선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택배 업계의 백마진이 불공정 거래 행위에 해당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부는 백마진 외에도 택배 업계의 전반적인 계약과 거래 등 관행에 대한 실태 파악에도 착수했다. 올해 말까지 ‘특별 제보 기간’으로 정해 불공정 거래 신고도 접수한다. 배송 수수료를 포함한 가격 구조 전반의 개선 방안을 사회적 논의를 거쳐 추진한다는 방침이지만, 합의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택배 운임 하락은 몇몇 주요 택배사의 가격 경쟁에 따른 결과로, 인위적 조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소비자들이 택배 운임 인상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내 택배 산업의 문제가 택배기사에게 집중되고 있고 그 해결이 시급하다는 게 정부의 인식이다. 정부는 택배기사의 과로 문제에 대해 “제도, 인프라, 기술 등이 택배 산업의 양적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그 부담이 택배기사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지연 배송 발생해도 택배기사에 불이익 조치 금지돼
정부는 이날 택배기사의 산업안전에 관해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대책을 내놨다.
우선 안전보건 기준 규칙 개정을 통해 장시간 고강도 노동 방지를 위한 사업주의 조치 의무를 구체화하기로 했다. 작업과 휴게시간 배분도 여기에 포함된다. 또 택배기사의 요구에 따라 물량 축소와 배송 구역 조정 등을 하는 시스템을 택배사별로 구축하고, 물량 조정으로 지연 배송이 발생해도 택배기사에게 불이익 조치를 못 하게 할 방침이다.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 법규의 개정을 통해 택배사에 안전보건 조치 의무도 부여한다.
국토부의 택배 서비스 평가에서는 신속성 기준을 완화하고 작업시간 관리 제도 도입 등에 관한 기준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심야 배송 제한 등을 위한 시스템을 못 갖춘 경우 택배 전용차 증차 규제 등을 통해 관리를 강화한다.
정부는 택배기사 보호 방안을 포함한 ‘생활물류서비스법’을 올해 안으로 제정할 계획이다. 공포 이후 1년이었던 법 시행 시점도 공포 이후 6개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박종식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 대해 “일부는 택배 업계에 대한 권고 수준에 머물러 실효성이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택배기사의 과로 해결을 위한 정부 차원의 첫발을 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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