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포대장① '오공' 출신 방공포병사령관이 그러웠던 시절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대대본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포대로 향했다. 발칸 포대장을 마치고 약 7년 만에 다시 오는 군산이다. 7년 전에는 타군 손님으로 군산 포대를 방문 했었는데, 이날은 포대장으로 포대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인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임자(육군에서 전군한 장교, 소령)로부터 포대 현황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포대를 돌아보았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지대공 유도탄 포대는 과거 주한미군이 운영하다가 한국군에 이양한 포대였고, 군산 포대는 필자가 부임할 때 까지만 해도 과거 미군들이 사용하던 건물이 일부 남아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 많았지만 부대는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포대에 도착한 지 1~2일 후에 대대장 주관으로 포대장 이취임식이 실시되었고, 포대장 이.취임식에는 대대 예하의 타 포대장들도 참석해서 전임 포대장과 신임 포대장의 이·취임을 축하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오공’ 출신 포대장의 비율은 전체 포대장의 10 % 정도였다.) 이·취임식이 끝나고 대대장과 타 포대장들이 복귀 출발한 후, 필자는 포대 간부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포대장 지휘방침을 하달했다. 유도탄 포대장 때에도 발칸 포대장 때와 같이 최상의 전투력 유지에 중점을 두고 규정과 절차에 의거해서 포대를 지휘했다.
물론 필요시에는 융통성도 발휘했다. 당시 포대원 중 장교와 병사는 모두 공군에서 임관 및 교육 수료한 자원들이었고, 간부는 90% 이상이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자원들이었다. 포대 간부 중에 포대 주임원사와 보급반장(원사)은 필자가 발칸 포대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안면이 있던 부사관들이었는데, 포대 주임원사인 백 모(某) 원사는 인사행정 업무도 맡고 있었고(육군에서는 ‘인사계’라 칭했다), 필자가 알기에 매우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한 간부였다. 필자는 포대장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백 모(某) 원사를 포대 주임원사로 계속 근무하게 하면서 포대원의 단결과 기강을 이끌어냈다.
필자는 포대 지휘권을 인수 받은 날 저녁부터 포대장실에 대기하면서 부대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서 포대 전반적인 현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포대의 작전 수행 능력, 장비 관리, 인적 구성, 사기, 복지 등은 대체로 양호하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방포사에는 포대장이나 대대장으로 부임하면 대략 보름 정도를 부대에서 숙식하면서 해당 부대의 작전, 인원, 장비 등등을 파악하는 제도가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단기간에 부대 현황을 파악해서 향후 부대 지휘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는데, 의도는 좋으나 너무 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무실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공군에서는 이렇게 부임 후에 강제로, 또 장기간 부대 대기를 하며 부대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없었다.
책임감 있는 지휘관이라면 그런 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 대해서 빠른 시간 내에 장단점을 파악하고 지휘하는 것이 당연한 것 일 텐데...아무튼 이런 제도는 꽤 오랫동안 유지 되었고, 어느 시점에서는 포대장 부임 후 대기 기간이 한 달이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즉, ‘오공’ 장교가 여단장, 방공포병사령관이 될 때 즈음하여 이러한 ‘부임 후 대기 제도’는 대폭 축소 또는 없어졌다.
유도탄 포대장은 유사시 적기와 교전해야하는 최일선의 임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독립 부대장으로서 포대의 인사, 정보, 군수, 작전 등 모든 사항을 홀로 판단하고 이끌어 나가야 하는 등, 지휘 폭이나 책임 범위 등을 보았을 때 소령으로서 매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다. (빈약한 참모 조직을 가지고 포대장이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식으로 포대의 모든 사항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직책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방공포병 무기와 병력을 다루는 유도탄 포대장은 업무의 범위 및 책임감 면에서 공군의 소령 직위 중 결코 만만치 않은 직책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방공포병 장교의 꽃’이라고 생각한다.
군산 포대장으로 약 2년간 근무하면서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병력 관리 면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간혹 부대내 불군기 행위라던가 휴가 중인 병사가 불군기 행위로 적발되어 부대로 통보가 되는 등의 문제는 가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만한 큰 사고는 없었다. 그만큼 포대원(간부, 병사)들의 자질은 훌륭했고, 단결도 잘 되었으며, 필자가 포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필자의 지휘방침을 잘 따라 주었다. (그러나 군산 포대장을 마친 후 수행한 2차 포대장 때는 병력 관리 때문에 대단히 많은 곤란을 겪었다.)
작전장비 관리 및 운영 면에서, 당시 운영하던 작전장비는 수차례 장비 성능개량을 거쳤지만 장기간 운영하던 만큼 잔고장도 많이 있었기에 포대장이나 작전/장비 정비 팀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임무 수행을 해야 했다. 포대 작전장비에는 레이다가 여러 개 있는데, 필자의 초급장교 시절 레이다 부대 경험은 포대를 지휘하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고(레이다 정비팀과 의사소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필자로서는 큰 자산이었다), 게다가 당시 포대 사격통제장비 정비를 비롯한 레이다 정비팀의 수준은 방포사 내에서도 수준급이었기에 필자는 자신감을 가지고 포대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무 돌입을 앞두거나 임무 수행 중에 갑자기 작전장비중 하나에 이상이 생겨서 분초를 다투며 장비 정비를 하던 일은 포대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경우였다.
한편, 포대의 작전 수행 능력을 점검하고자 필자는 부임 초기에 인근 비행단과 협조하여 실전적 훈련을 실시했다. 즉, 전투기 편대(가상 적기)가 포대를 적 기지로 가상하여 포대로 접근 및 공격을 실시하였고, 포대에서는 이를 방어하는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포대는 가상 적 전투기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교전 임무를 수행했다.
훈련 전 과정을 지켜본 필자와 포대 작전 팀은 ‘포대 작전 능력 분석’이 정확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포대 작전수행 능력에 대하여 보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후에 상급부대에서 누가 오더라도 훈련 사례를 브리핑하면서 포대의 작전 수행능력에 문제점이 없음을 강조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당시 전투기 편대장은 필자의 사관학교 동기생이었다. 포대의 강약점을 사전에 세밀하게 토의하였고 전투기 편대는 이에 따라 포대에 대한 가상 공격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긴밀하게 비행단과 협조하여 훈련한 것은 처음인데, 필자가 ‘오공’이었기에 이런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계속)
예비역 공군 준장,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