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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회장 별세

32세에 꿈꾼 반도체신화를 실현한 ‘불패의 경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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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기자
입력 : 2020.10.26 17:05 ㅣ 수정 : 2020.10.26 17:19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파란만장한 삶 살아 / 통렬한 한국정치 비판으로 논쟁 불러일으키기도

[이서연 기자] 지난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격동의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큰 기여를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 회장이 영면한 후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온 평가들은 고인의 일생이 기업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의미의 크기를 시사한다. 

 

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 [사진제공=연합뉴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경북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53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시절 선진국을 배워야한다는 이병철 회장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외로웠던 유학 시절 영화에 심취해 3년간 영화 1200편 이상을 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친 후 귀국한 이건희는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서울사대부중)에 편입해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교 시절 레슬링부에서 활동했다.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레슬링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져 추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며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회장은 한·일경제협회 부회장(1981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1982∼199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8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1993∼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1996년) 대한레슬링협회 명예회장(1997년),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회장(1998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특별고문(2002년), KOC 이사(2009년) 등을 지내며 경제계뿐만 아니라 체육계 등에서도 왕성히 활동했다.   

아버지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기도 했다. 훗날 이건희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 몸담기도 했다. 미국 유학 중에는 자동차에 심취해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자동차 구조에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추기도 했다. 이 시절 자동차에 기울였던 관심과 애착은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 배경이 되었다.

1966년 이 회장은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리움미술관장)를 만나 맞선을 봤다. 1967년 4월 결혼했다.

■ 집념으로 이뤄낸 메모리반도체 1등 신화

197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반도체와 정보통신 제조업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당시 한국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삼성에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며 건의했다. 호암은 극구 만류했으나 당시 32세였던 이 회장은 개인 자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의 집념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1등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다.

호암이 위암 판정을 받자 이 회장은 ‘왕자의 난’ 등 우여곡절 끝에 삼성 후계자로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삼성그룹 부회장 자리를 맡으며 2세 기업인으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마침내 1987년 12월 1일 제2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호언했다.

■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경영의 근본을 바꾼 프랑크푸르트 선언

 

1993년은 삼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기록되고 있다. 취임 5년차인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한 가전매장에서 홀대받고 있는 삼성 제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들을 소집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며 기존의 경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건희 회장의 이 발언은 프랑크푸르트 신 경영선언으로 불리운다. 삼성그룹 6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꼽히며 이를 전환점으로 삼아 오늘의 세계 일류의 삼성그룹, 글로벌 삼성전자가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경련은 이 회장의 별세 후 추모사에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고인의 혁신 정신은 우리 기업인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이라며 고인의 기업가 정신을 되새겼다.

이 회장은 늘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삼성이 만든 휴대폰 팩시밀리 등 통신기기 15만대, 약 500억원 어치를 소각한 사건은 이 회장의 ‘품질 우선주의’ ‘소비자 존중주의’ 경영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이후 삼성전자는 애플과 함께 스마트폰 판매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길, “정치인은 4류, 기업은 2류”

 

이건희 회장의 ‘삼성 불패’가 무너진 적도 있다. 1994년 대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자동차 사업에 자신있게 나섰으나 2000년 외환위기 탓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 르노에 매각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5년 4월 중국 방문 때 한국 특파원단과의 사석에서 “우리의 현 수준을 국제수준과 비교해 보면 정치인은 4류, 행정관료는 3류, 기업은 2류 수준”이라고 발언해 큰 파란을 겪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으로 첫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고, 2000년에는 전국 법학 교수 43명으로부터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로 고발된 이른바 에버랜드 전환사체 헐값 발행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2005년에는 막내딸 고 이윤형을 떠나보내며 개인적으로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2008년에는 삼성비자금 조성 의혹사건으로 인해 2009년 8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확정되었으며,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어 미래전략실이 해체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가 형제간 상속 소송으로 심신의 충격이 컸던 이건희 회장은 결국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졌다. 이후 6년 5개월이라는 긴 입원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건희 회장의 별세에 전 세계에서 애도와 추모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재계 최고의 리더’(대한상공회의소), 반도체 산업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실천한 기업인’(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삼성을 스마트폰, TV, 컴퓨터 칩 거인으로 키운 인물’(미국 뉴욕타임즈), ‘한국을 대표하는 카리스마적인 경영자’(일본 NHK 방송). 평생 삼성에 몸바쳐온 그에 대한 평가다.

더불어민주당은 25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경영권 세습을 위한 일감몰아주기와 정경유착, 무노조 경영 등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들은 우리 사회가 청산해야할 시대적 과제”라며 “이 회장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국민의 힘 역시 같은 날 대변인 논평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앞장서 이끌었던 고 이건희 회장의 명복을 빈다”며 “고인은 반도체 휴대전화 등 첨단 분야에서 삼성이 세계1위의 글로벌 기업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고, 국민의 자부심을 높였던 선각자”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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