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P 사업 협약, 초과정산금의 해법은 정녕 없을까?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부터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편집자>
■ 방사청 담당자, 정산에 따른 협약 대금 지급 취지로 항소심 증언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달 20일 오후 2시30분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제303호 법정에서 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이 대한민국(소관청은 방위사업청)을 상대로 제기한 ‘한국형 헬기 개발 사업’(Korean Helicopter Program, 이하 KHP 사업) 초과정산금 청구사건 항소심 변론 기일이 진행됐다.
이날 KHP 사업과 관련하여 2006년 계약 및 협약 체결 업무와 2012년 원가정산 기준설정 업무를 수행한 J부이사관(공로 연수 중)이 핵심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했다. 그는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은 KHP 연구개발 정산 결과에 따라 각 계약 및 협약 대가를 지급하기로 하는 내용의 KHP 개발투자금 보상합의서와 KHP 각 계약 및 협약을 체결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그의 증언을 통해 KHP 협약 역시 계약과 동일하게 정산 결과에 따른 초과정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음이 분명히 확인됐다. 이는 지금까지 정산 결과에 따른 협약 대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해 온 방사청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다.
KHP 사업은 한국형 기동헬기를 국내 연구개발을 통해 획득하겠다는 목표로 방사청이 당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이하 산자부)와 함께 2005년경부터 추진해온 국책 사업이다. 군이 운용하던 노후화된 외국산 헬기를 국산화함은 물론 민·군 겸용 구성품을 개발하여 장차 민간에서 사용하는 헬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목적이었다.
■ 방사청, 협약의 경우 예산 확보 어렵다며 초과정산금 지급 거절
방사청은 KHP 연구개발을 추진하면서 충분한 사업 예산 확보가 여의치 않자 2006년 5월 개발비(최종 정산을 통한 확정액)의 20%를 참여업체들이 우선 부담하고 개발에 성공해 양산이 이뤄지면 양산 계약에서 이 비용(개발투자금)을 보전해 준다는 내용의 ‘개발투자금 보상합의서’를 한국항공우주산업(주)(이하 한국항공) 등 참여업체와 체결했다.
방사청은 개발비의 80%에 해당하는 사업비 예산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자 산자부의 출연금 예산을 일부 지원 받아 2006년 6월 방사청 사업비 예산은 ‘계약’으로, 부품 개발에 투입된 산자부 출연금 예산은 ‘협약’으로 체결했다. 당시 KHP 부품 개발은 한국항공과 항우연이 담당해 출연금을 재원으로 진행된 개발 약정은 ‘한국항공 협약’과 ‘항우연 협약’으로 체결됐다.
출연금은 대가 관계가 없어 개발 결과물은 통상 개발업체가 소유하나, 이번 협약은 방위력개선 사업 일환이어서 재원만 산자부가 출연할 뿐 개발 결과물을 정부가 소유하는 등 무기체계 연구개발 계약과 동일했다. 방사청도 계약과 협약의 실질과 내용에 차별을 두지 않고 개발이 종료된 시점에 투입된 비용을 정산(방산원가 적용)하여 대금을 지급한다는 기준을 정했다.
그러나 2012년 하반기에 KHP 사업 최종 정산을 통해 계약 및 협약의 초과정산금을 확인한 방사청은 계약의 경우 약속대로 초과정산금 중 80%를 개발 단계에서 지급하고 업체가 부담한 개발투자금의 초과정산금 20%는 양산 계약에서 보전해 주었다. 하지만 한국항공 및 항우연 협약의 경우 예산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초과정산금 지급을 거절했다.
■ 한국항공·항우연 소송 제기…서울행정법원, 공법 관계 강조하며 기각
정산 후 대금 지급을 약속했던 방사청이 태도가 달라지자, 한국항공과 항우연은 초과정산금으로 각각 130억원과 250억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방사청과 최초 협약 체결 당시 ‘분쟁 발생 시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전속합의 관할로 한다’는 내용이 협약서에 명시됐기 때문이다.
한국항공 소송은 1, 2심 재판부가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최종심에서 대법원은 한국항공 협약이 출연금 예산의 집행에 관한 공법상 계약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1, 2심 판결을 파기·취소하고 해당 사건을 서울행정법원으로 이송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항우연 사건 항소심도 동일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사건을 이송 받은 서울행정법원은 공법 관계라는 특성을 강조하면서 당사자 간 약속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항공과 항우연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따라 한국항공 사건은 항소심도 기각돼 상고심이 진행 중이며, 항우연 사건은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 상태다.
한 방산 전문 변호사는 이 소송에서 다툼의 대상인 소송목적물은 초과정산금의 80%에 해당하는 산자부 출연금으로 한정되며, 20%는 개발투자금 보상합의서와 양산 계약에 따라 방사청이 사업비 예산으로 보전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즉 적어도 협약 초과정산금 20%의 금원에 대한 청구는 출연금과 전혀 무관한 사법상 계약관계에 속하는 것이란 얘기다.
이에 항우연 협약 참여업체로서 초과정산금 청구액 250억원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협약 초과정산금 20%에 대한 청구를 별도 민사소송으로 제기하여 해당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에 있다.
■ 법조계, “공법상 계약이라도 당사자 간 의사합치가 가장 중요”
법조계에서는 “사법상 계약이건 공법상 계약이건 당사자 간에 어떤 의사합치를 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다. 게다가 2006년 협약 체결 당시 방사청이 원가정산 결과에 따라 초과정산금 지급을 약속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처분문서와 공문, 관련 회의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더구나 당시 KHP 사업단에서 보상합의서 및 협약서 초안 등 작성업무를 담당했던 예비역 대령 두 명(육군 J대령, 공군 H대령)도 지난해 같은 취지로 법정에서 증언했다.
결국, 본 사건의 실체는 ‘방사청이 정산 결과에 따라 협약 대가 지급을 약속하고도 예산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초과정산금의 지급을 거절’한 것이다. 비록 KHP 협약이 공법 관계에 해당하더라도 예산 미확보를 이유로 대가지급 의무가 부정될 수는 없다. 이와 관련, 행정법 전문가인 김연태 고려대 교수와 김대인 이화여대 교수는 “정부가 행한 약속은 공법상 계약일수록 더 확실히 지켜야 하는 것이 행정법의 기본원칙”이라고 주장했다.
KHP 협약 참여업체들은 그동안 방사청을 믿고 개발비까지 부담해 가며 연구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방사청의 부당한 약속 파기로 참여업체들이 지급받지 못한 금액은 최종 정산액 기준으로 400억원이 넘는다. 아무 잘못도 없는 참여업체들이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수백억의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대법원의 현명한 최종 판단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법원마저 업체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공법 관계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국내 굴지의 방산업체들조차도 정부가 발주하는 무기체계 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하기를 꺼리게 될 뿐 아니라 과거 삼성이 그랬던 것처럼 해당 기업들도 서서히 방위산업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