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종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8.17 15:25 ㅣ 수정 : 2020.11.21 16:06
공군대학 시절엔 공부와 체력보강에 힘써 / 둘째 딸 출산하면서 남아선호 사상에서 벗어나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작전통제부서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똑같은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처음 오산기지로 부임할 때는 작전통제부서 근무를 마친 후에 유도탄 포대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보다 선임인 장교들이 꽤 있어서 유도탄 포대장으로 나가려면 최소한 2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 해 가을에 즈음해서 공군대학의 정규 ‘지휘관 참모과정’ 모집 공고가 나왔다. 대위 때 입과한 ‘초급 지휘관 참모 과정’은 대학원 위탁 교육 때문에 너무 늦게 교육에 입과한 관계로 2~3년 후배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고, 주력 기수가 아닌 관계로 여러모로 피곤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기생들이 주력기수가 되는 그 다음해 공군대학의 ‘지휘관 참모과정’ 입과를 지원했다. 이 ‘지휘관 참모과정’ 입과는 시험을 치루어서 합격해야 입과가 허용이 된다. 합격자 발표를 보면서 인생에서 이런 시험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하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고 해가 바뀌면서 작전통제부서 업무를 마무리하고, 공군대학으로 향했다. 그때가 2월 말로 기억한다. 공군대학 입과는 교육파견이기 때문에 소속은 그대로 방포사에 두고 교육에 입과했다.
이때 아내와 큰 아이는 서울로 이사하지 않고 송탄의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필자만 공군대학 장교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는데, 주중에는 서울에 있는 공군대학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송탄에 가서 가족과 같이 보냈다. 한편 새해가 되면서 아내가 둘째를 가졌다.
공군대학에 입과한 첫 날, 앞으로 10개월 정도 생활하게 될 숙소를 배정받고 짐 정리를 했다. 오랜만에 동기생들과 만나서 지낸 공군대학 생활은 다시 고향에 돌아 온 느낌이었다. 지금의 보라매 공원은 옛 공군사관학교 자리이고, 공군대학은 공군사관학교 한쪽 끝에 있었다. 필자가 ‘지휘관 참모과정’ 교육에 입과할 당시 공군대학은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한 다음에도 여전히 보라매 공원 한쪽에 계속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각 군의 대학이 모두 대전 쪽으로 이전했다)
공군대학에 입과해서 공부 이외에 가장 집중했던 것은 ‘체력보강’이었다. 지난 해에 작전통제부서에서 근무하면서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음을 느꼈는데, 교대 근무가 주된 원인이었다. 즉, 교대 근무의 특성상 숙면을 취하기 어려웠고(몸은 늘 긴장한 상태), 피로를 많이 느꼈으며, 체중도 늘었다. 그래서 공군대학에 입과한 다음날부터는 아침 5시 30분 경에 일어나서 옛 공군사관학교 연병장인 보라매 공원에서 30분 정도 구보를 하고, 일과 이후에도 30분 정도 구보를 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계속 구보를 했는데(악기상인 경우를 제외하고), 그 해 초여름의 어느 날 장교 하정복을 새롭게 맞추면서 허리둘레를 측정해보니 공군대학에 입과할 때 보다 무려 3cm가 줄었다. 체중은 약 5kg이 줄었고. 대략 그때쯤부터 체력이 다시 예전과 같이 돌아옴을 느꼈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해 초여름부터 2년 선배 장교와 함께 단전호흡 수련을 시작했다. 단전호흡 수련을 하면서 몸이 유연해지고 강해짐을 느끼게 되었고, 수련을 마치고 나면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다. 몸이 유연해 짐을 느끼게 된 것은 학생장교들과 축구를 하면서였다. 필자가 사관생도 시절에 낙하산 강하 훈련을 받으면서 착지를 잘 못하여 발목을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인지 운동을 할 때 순간적인 동작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발목이 시큰 거려서 제대로 운동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단전호흡 수련을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그런 현상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단전호흡 수련이 여러 가지로 심신의 단련에 좋은데, 공군대학 교육을 마친 이후로는 부대 업무에 치중하다보니 지속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에 단전호흡 수련을 다시 시작하리라 생각했는데, 이 또한 속세에 물들어 살다보니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공군대학 교육과정은 공부할 양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시험도 많았는데, 시험 때가 되면 일주일 정도는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대학입학 수능시험을 앞둔 고등학생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공군대학 지휘관 참모 과정에는 외국군 장교도 입과해서 한국군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는다. 필자가 교육 받은 해에는 일본, 태국, 대만 공군에서 각각 1명씩 입과 했고, 외국군 장교 모두 특징이 있다 보니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외국군 장교들 중에서 일본군 장교는 우리말을 꽤 잘했고 한국을 무척 좋아한 매우 인상적인 장교였다. 이 장교는 임관년도가 필자보다 4~5년 위로 기억하는데, 대령 진급 후에는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고, 후에 일본 자위대에서 3성 장군까지 진급하고 전역했다고 한다.
필자가 대령 때 군 관련 국제회의에서 만난 어느 일본군 장교에게 ‘아무개 장교와 한국 공군대학에서 같이 공부를 했는데, 혹시 이 장교의 근황을 아는가?’ 라고 물어보니, 당시 이 장교는 이미 장군으로 진급해 있었고, 자위대 내에서도 꽤 능력있는 장교라고 한다. 이 장교의 근황을 들으면서 세상이 참 좁다는 것을 느꼈다.
8월이 되면서 약 2 주간은 ‘을지연습’에 학생 장교들이 투입되었는데, 이것도 교육 과정에 포함된 사항이다. 필자를 비롯한 몇몇 학생장교는 워게임 인원으로 분류 되어서 오산 기지로 가게 되었고, 이때는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아내는 출산을 두 달 정도 남겨둔 시기였다. 아내가 몸도 무거운 상태에서 이제 만 3살이 되어가는 큰 아이를 돌보며 여러 가지가 힘들었을 때, 일과 이후에 아내와 큰 아이를 지켜보며 집에서 지내는 것이 참 좋았다.
을지연습이 끝나고 어느 덧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초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군인들은 업무 특성상 자기 자녀가 태어날 때 아내 옆에 있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운 좋게도 아내가 출산할 때마다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는 대학원 위탁 교육 기간이었고, 둘째가 태어난 날은 공휴일이라서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당시 필자는 왜 그랬는지 ‘남아 선호 사상에 몰입’되어 있어서 둘째는 반드시 아들을 낳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얼마나 아들을 원했는가 하면, 첫 아이(딸)를 낳고서 한동안은 ‘아마 이게 꿈일 거야. 빨리 꿈에서 깨어나야지’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날 날짜가 다가오면서(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째도 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점점 ‘하늘의 뜻에 맡기자’하는 쪽으로 되어갔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간호사가 둘째 아이를 안고 나오면서 필자에게 대략 이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딸입니다. 큰 아이도 딸인데 (실망이 크시겠어요)...”. 이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내 운명인가 보다. 예쁘게 키우자.’ 지금은 딸만 둘 있는 것이 좋다. 사관학교 동기생들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아들보다 딸이 좋아. 아들은 말도 안듣고.......”
공군대학 수료를 한 달 정도 앞두고 해외 견학(공식 명칭은 생각이 안난다.)이 있었다. 공군 수송기(C-130)를 타고 필리핀, 태국, 싱가폴을 방문했고, 방문하는 국가의 국방대학을 방문하는 등 군사외교 활동과 더불어 학생 장교들의 견문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이 해외견학이 필자에게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고, 필리핀(마닐라)과 태국의 하늘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어느 덧, 10개월의 교육 과정이 끝나고, 각자 다음 보직을 부여 받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