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46)] 국군 중 가장 먼저 해군을 창설한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0.08.07 11:00 ㅣ 수정 : 2021.01.08 10:10
국군 모체가 된 미 군정 ‘조선경비대’와 해군 원조인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海防兵團)’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도발 발생 12일째 되는 2010년 12월4일 토요일임에도 국방부장관 이취임식을 강행했다. 신임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북한군이 도발할 시 우리 군은 그 원점 뿐만 아니라 지원과 지휘세력까지도 완전 타격하는 철저한 응징보복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히며, 예하 부대에는 “현장에서 선조치 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도발원점 타격을 지시한 결단력이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미 6ㆍ25남침전쟁 발발전인 1949년 8월17일 우리 해군에 의해 기록상 유일하게 도발원점과 지원세력을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몽금포작전’이 과감하게 시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2012년 당시 해군총장 최윤희 제독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 국군의 모체가 된 미 군정 조선경비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이 되자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경력이 있는 청·장년은 되찾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을 지키는 군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8월30일 좌익 세력이 먼저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했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계열도 10월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11월 미 군정에 등록된 군사 단체는 무려 30개에 이르렀다. 사설 군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소란이 빚어지자 미 군정은 좌우익의 모든 군사 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또한 경찰력만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은 직접 군대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13일 미 군정 내에 국방사령부(뒤에 통위부로 명칭을 바꿈)가 출범했다. 국방사령부는 38도선 경비와 해상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협의하기로 하자 미 군정은 정식 군대 대신 병력 규모 2만5000명의 치안군(조선경비대)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각 도에 1개 연대씩 경찰예비대를 편성하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자리 잡은 태릉에서 1946년 1월 15일 조선경비대 1연대 A중대가 창설됐다. 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청주), 8연대(춘천), 9연대(제주)가 편성됐다.
이에 미 군정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을 상해까지 가서 모셔왔으며, 광복군의 구조와 계급·명칭 등을 수용하려고 했다.
■ 해군 원조인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海防兵團)’과 국군 창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육군 못지않게 해군의 역할도 중요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은 1945년 8월 ‘조국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라는 모집광고를 냈다. 결국 육군보다 먼저 장병 200여 명을 모아 11월11일11시에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열었고 이날은 해군 창설기념일이 되었다.
‘해방병단’의 설립은 1894년 7월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4개월 만에 우리 바다를 스스로 지키는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창립 날짜가 11(十一)월 11(十一)일인 이유는 선비 사(士)가 두 번 겹치는 형태로 해군의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손 제독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46년 1월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 초대교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직접 생도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등 장교 육성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로 편입된 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1946년 1월 초 태극기가 나부끼는 진해 앞바다에서 첫 해상 훈련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인 ‘충무공정’을 진수시켜 인천 근해에서 편대 훈련을 했다.
손 제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12월15일 정식으로 발족된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직을 맡았고,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껴 1949년 4월15일 해병대도 창설하였다.
한편 1947년 가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조선경비대를 5만명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12월 기존의 9개 연대로 서울·대전·부산에 각각 여단을 창설했고, 이듬해 4월 추가로 2개 여단이 편성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국군 창설이었다. 1948년 8월 16일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발표하여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실천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국군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미 군정의 조선경비대와 해방병단이 모체가 된 조선해안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8월31일 광복군 선·후배인 유동열 미 군정 통위부장과 이범석 국방장관 사이에 군사 업무가 이양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하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