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종의 공군 이야기 (26)] 결혼, 대학원 졸업, 그리고 육군 방공포병사령부의 공군 전군
최환종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6.05 11:14 ㅣ 수정 : 2020.06.05 11:14
대학원 입학하던 해 천생배필 만나 결혼식 올려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리스트] 2학기 중반이 되면서 석사학위 논문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막했으나 논문 주제를 골똘히 생각하며 집중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논문주제가 떠오르며 전체적인 윤곽이 잡혔다.
그때가 2학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3학기를 마칠 때 즈음해서 논문은 초안이 거의 완성되었고, 학술회의에 나가서 발표도 했다. 가을에 학교에서 논문 발표와 졸업 시험만 남겨놓고 있었다.
■서른 즈음에 큰 아이 품에 안아
한편, 대학원 입학을 전후해서 부모님과 친척들은 언제 결혼할 것이냐고 은근히 부담을 주었고, 필자도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관학교 동기생중 결혼한 인원은 80% 정도였으니, 필자는 동기생 중에서 결혼이 늦은 편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 초여름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천생배필을 만나게 되었고,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그해 가을에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원 입학과 결혼! 여러 가지로 흐뭇한 한해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8월 말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내 나이가 서른인데도 처음에는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내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아이를 내 품에 안았을 때야 비로소 내가 아빠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때가 4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공군에서는 큰 이슈가 있었다. 창군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전군(轉軍) 행사가 그것인데, 3학기가 끝날 때쯤 해서 ‘효율적인 방공(防空)작전’을 위하여 육군 방공포병사령부가 공군으로 전군 하였고, 전군과 동시에 공군 방공포병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필자는 대학원 졸업 후에 방공포병 사령부 예하 부대로 보직이 주어졌다.)
4학기가 되었고, 졸업시험과 논문심사를 무난하게 통과했다. 논문심사를 끝낸 그날 저녁은 나이어린 동급생들과 같이 마음 편하게 서로의 논문심사 통과를 축하하며 축하주를 들었다. 대학원 입학 초기에는 6년 만에 공부하면서 많은 것이 어려웠고 힘들었고,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전투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했는데, 어느덧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위탁교육 일정으로 보면 4학기는 다음해 2월 말까지이고, 그때까지는 부대에 복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학교 연구실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해 12월에 공군대학의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에 입과했다. 주위에서는 구태여 그럴 필요 있느냐, 조금 더 학교에서 지내다가 복귀하지 그러느냐고 얘기를 했지만, 필자는 어차피 위탁교육 임무는 완수했으니 하루빨리 부대로 복귀하고 싶었다.
대학원 졸업식은 다음해 2월 중순에 있었다. 어머니와 장모님 그리고 아내와 아직 첫 돌이 지나지 않은 큰 아이가 졸업식에 참석해서 필자의 대학원 졸업을 축하해 주었다. 대학원 과정 2년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사관학교 졸업 후 사회를 일부나마 접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공부 이외에도 대인관계 등 여러모로 시야를 넓힌 2년이기도 했다.
■공군대학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 수료 후 소령 진급
그해 3월 말에 공군대학 초급 지휘관 참모과정 교육을 수료했고, 4월 1일부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어서 공군 방공포병학교 운영참모 교육에 입과했다. 이 과정은 지대공 유도탄 관련 교육을 받지 않은 장교를 대상으로 한 임시 과정이었다. 즉, 필자같이 유도탄 포대 근무 경험이 없거나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교 중 대위로 진급한 장교들이 교육 대상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육군의 고등군사반 정도에 해당되는 과정이었고, 여기서 호크, 나이키 등의 지대공 유도탄 시스템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했다.
약 3개월 반 정도 교육을 받고 보직을 부여받았다. 첫 보직은 수도권 방공포병여단의 작전통제부서 선임장교였다. 여단장에게 보직신고를 하고 부서장에게 인사 후에 업무 파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포사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또 다른 차원의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공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를 먼저 얘기하면, 몇 년 전에 비행장 발칸포대를 인수할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즉, 발칸 포대를 인수할 때는 필자를 제외한 전 포대원이 육군에서 전군한 인원들이었지만, 비행장이라는 공군 부대 내에 포대가 있었기 때문에 포대원들이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공군의 특성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군의 특성은 융통성, 기동성, 신속성, 다양성 등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공군의 작전개념, 부대관리 기법, 상급자와 하급자 관계 등은 타군과 차이가 있다.)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된 방공포병사령부 근무, 육군규정 적용?
그러나 방공포병 사령부(이하 방포사)가 공군으로 전군한 이후에는, 비행장 발칸포대를 인수할 때와는 많이 다른 현상이 벌어졌다. 전군한지 1년이 지났는데도,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부대원의 99%가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장병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여전히 육군의 사고방식 하에 부대를 운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장은 공군이지만 부대원들(특히 장교들)의 사고방식이나 일처리 하는 방식 등은 아직 육군 부대 같았다.
공군규정은 무시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지휘관의 개성과 특성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육군 규정을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런 경우가 상황에 따라서는 장병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 이 당시에 육군과 공군의 문화적인 차이를 많이 느꼈고, 그 문화적인 차이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육군 방공포병사령부의 문화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 말의 의미는 후에 다시 얘기하겠다.)
그 문화적인 차이는 상당기간 동안 육군에서 전군한 장병들과 기존의 공군 장병들 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