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필자는 부대를 지휘할 때 규정과 절차를 중요시했다. 물론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모두 그렇게 했겠지만. 훈련할 때는 강하게 훈련하고, 훈련이나 평가 결과가 양호하면, 또는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포상 휴가(또는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즉, 부대를 지휘할 때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물론 필요시에는 융통성도 충분히 발휘했고, 이후 유도탄 포대장, 대대장, 여단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계속 이런 방식으로 지휘했다.
■전군된 포대원들은 헌병대의 담배상납 요구 받아, 헌병대장에게 강력 항의해 시정
포대원들에게 훈련은 강하게 시키고 규정과 절차 준수를 강조한 만큼, 포대원들의 사기, 복지증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애로사항이나 불만은 없는지를 수시로 확인했는데, 가끔은 그런 내용을 마음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공군으로 전군 이후에 비행장에 근무하는 기존 공군 병사들이 우리 포대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이었는데, 가장 흔한 예가 헌병들이 가끔 군기 순찰을 돌면서 사소한 이유로 군기 위반 카드를 끊는다든지, 포대원들이 외출, 휴가를 나갈 때 비행단 정문에서 헌병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포대원들에게 담배를 요구하는 부당행위 등이었다. 군기 위반 카드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으나, 부당하게 담배를 요구하는 행위는 참을 수 없었다.
즉각 헌병대장을 찾아가서 위와 같은 사실을 얘기하고 정중하게 시정을 요구했다. 당시 헌병대장은 소령이었고 필자보다 6~7년 선배 장교였는데, 헌병대장은 ‘감히 새파란 대위가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확인해 보겠다’고 하면서 차 한잔 하자고 한다. 그리고는 한동안 ‘담배 요구’ 같은 부당한 행위는 없었다. 그러다가 유사한 일이 또 생기면 헌병대장에게 찾아가서 시정을 요구했음은 물론이다.
이외에도 전군 초창기에는 비행단 지휘부에서 포대 병사들을 전투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간부업무를 보조하거나 또는 행정업무나 보는 병사로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포대 임무를 저해하는 불합리한 임무가 하달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필자는 직속 대대장 또는 지휘부에 강하게 건의해서 포대 병사들이 대공방어 임무를 수행하는데 전념하도록 했다.
■ 방공포대대 창설되기 전까지 '부당한 차출' 명령 등으로 어려움 겪어
예를들어 ‘88올림픽 기간 중에 비행단 00지역의 지상경계 강화를 위하여 각 대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지상경계를 보강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포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하라는 것이었다. 황당한 지시였다. 포대 병사들은 한명 한명이 대공방어를 담당하는 전투원인데, 그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타 지역의 지상경계 임무에 배치한다니 대공방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마 전대본부(戰隊本部)의 어느 참모가 포대 임무는 고려하지 않고 계획한 것이었으리라. 필자로서는 말이 안되는 지시였다.
당장 대대장(당시 소령)에게 가서 ‘포대의 임무 수행상 포대원 차출은 불가하다’고 정중하게 건의했다. 처음에는 대대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무조건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필자도 이에 지지않고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졌다. 결국에는 필자가 대대장에게 “병력 차출로 인해서 대공방어에 문제가 생기면 대대장이 책임질 것인가?”라는 취지의 말까지 했다. 책임 소재가 대두되자 대대장이 한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결국 포대 병사 차출은 취소되었고, 포대원들은 고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포대에 대한 지휘부의 왜곡된 시각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데, 이런 문제는 전군 첫해 가을에 포대의 소속이 변경됨에 따라 크게 줄어들었다. 즉, 전군식 이후에는 포대가 각 비행단 소속이었으나 그해 가을에 방공포전대(戰隊) 및 방공포대대가 창설되면서 포대의 지휘는 방공포대대에서 하게 되었고, 비행단은 포대의 후방 지원 임무를 담당했다. (* 공군에서 전대(戰隊)는 대령이 지휘하는 부대임)
이런 가운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88 올림픽도 끝났다. 이때부터 필자는 다소 여유를 가지고 포대를 지휘할 수 있었고, 일과시간 이후나 주말에는 하고 싶은 운동을 하면서 체력관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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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장에 이끌려 골프입문, 대령 때 첫 싱글
강원도 부대에서는 좁은 부대 내에서 특별히 운동할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제한된 공간에서 족구나 할 정도이고 조깅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말에는 부대에 잔류하는 장교들과 같이 인근 산봉우리까지 걸어서 왕복하는 것이 운동이자 큰 낙이었다.
그러나 군산 비행장은 아주 아주 넓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30분 정도 활주로를 따라서 구보를 하고, 아침 일과 시작 후 일조행사(일과 시작과 동시에 사무실 밖에 집합해서 국군도수체조와 간단한 지시 및 강조사항을 전파하는 제도. 이전에는 공군만 시행했다)를 마치고 병사들과 1km 정도 구보를 했다. 일과 후에는 테니스 등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장이 갑자기 필자에게 묻는다. “포대장은 주말에 뭐하고 지내나?”. 그 당시는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할 때다. “네. 밀린 잠을 자고, 그저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대장이 필자에게 “그러면 이번 주말부터 골프장으로 나와라. 내가 가르쳐 줄께!”.
필자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당시 대령이었던 부대장은 후에 3성 장군으로 전역했다. 이 분은 공학박사 학위를 가진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었고, 폭넓은 지식과 아량과 융통성을 가지고 지휘를 하는 분이었다. 본받을 점이 정말 많은 분이었다.)
그리고 그 주말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물론 골프채는 빌려서 했다. 골프를 처음 배우는 날, 부대장이 골프장 옆에 있는 연습장에서 몇 번 시범을 보이더니 “봤지? 따라오게!”.
사전 연습 기간도 없이 바로 실전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며칠간 골프 관련 책을 구해서 기본적인 골프 규정과 골프채 번호별 용도 등은 공부했지만 골프채를 가지고 스윙 연습은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첫날 골프장에서 필자가 어떠했겠는가? 아무튼 용감하게 골프채를 휘두르면서 18홀 경기를 마쳤다. 마친게 아니라 따라다닌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장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필자에게 골프 규정부터 가르쳐 주었다. 그날 저녁, 부대장은 같이 운동을 한 동반자들에게 저녁을 사주면서 필자에게 얘기했다. “골프는 신사의 운동이네. 그리고 골프 규칙은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적용하면 틀림없네!”
그러나 독학으로 골프를 배우려니 실력향상은 미미했다. 골프는 군산 포대장을 마치고는 한동안 하지 못했고, 이후 중령이 되어서 가물에 콩나듯 가끔 골프를 하다가 대령이 되어서야 첫 싱글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