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칼럼니스트 입력 : 2020.03.11 14:41 ㅣ 수정 : 2020.03.18 10:10
미군, 한국전에서 2주간의 공방에도 점령 못한 최초의 사례로 희생자만 낳아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치열했던 고지전이 일어난 곳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전투지역은 ‘단장의 능선’이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중에서도 ‘단장의 능선’이라는 맵이 있었을 정도이다. ‘단장의 능선’은 강원 양구와 인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중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를 연결하는 5km 정도의 능선을 말하며, 지금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Stan Carter)가 전투상황을 취재하면서 어느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한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데에서 암시를 받아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여 이후부터 931고지 일대를 ‘단장의 능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한 프랑스 감독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1955년에 발표했고 1956년 오스카상 다큐멘터리 부분에 출품도 했는데 영화제목은 'Cr?vecœur'였다. 영어로 하면 'Heartbreak' 이며 한국어로 번역하면 '단장(斷腸 -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이라는 의미이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1951년 7월 10일 개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피의 능선 전투’와 바로 이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1951년 9월13일 ~ 10월13일 동안의 이 전투에서는 미2사단이 예하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와 미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하여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6, 12사단 및 중공군 204사단과의 일진일퇴를 벌이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역사, 2만5000명의 젊음을 앗아간 치열했던 전투
피의 능선 전투(8월18일~9월5일)에서 인민군을 몰아낸 미 2사단 정보참모는 적의저항이 경미할 것으로 예상하며 공격 기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포병사령관 워커 대령 등 연대급 지휘관들은 피의 능선처럼 단장의 능선도 저항이 완강할 것이라 고 건의했다.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1개 연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만으로 9월 13일부터 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단장의 능선 931고지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소모를 자초하게 되었다.
5개 포병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은 미 23연대는 18일 야간 공격까지 감행하여 중간 목표인 850고지를 점령하였고 병행 공격하던 좌인접 미 9연대 2대대가 894고지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이 9월20일 귀국하고 후임으로 로버트 염 소장이 부임했는데, 23일 미 23연대 1대대가 931고지를 점령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9월 26일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다시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늘어나 27일 공격작전을 중단시키고 재편성하였다. 미 2사단 23연대에 의해 시행된 이 ‘1차 공격 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을 통틀어 2주간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점령을 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의1차 공격에서 실패를 교훈삼아 사단장 로버트 염 소장은 3개연대를 동시에 투입시키는 ‘터치다운 작전’을 시행하였다. 위의 상황도와 같이 2차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72전차대대가 좌측 문등리 계곡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10월1일~5일 간에 사단공병대대로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스터만 특수임무부대(전차1개중대)는 우측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을 교란시켰다.
2차 공격은 10월5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미 23연대 1대대는 851고지를 공격하여 931고지에 대한 적의 증원을 견제하고 2대대와 프랑스대대는 6일 아침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좌측 미 38연대도 단장의 능선 서측방 490고지와 728고지를 점령하였지만 미 9연대는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867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7일 미 23연대는 2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851고지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기일전한 미 9연대가 단장의 능선 서측방 작전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미 38연대는 8일에 636고지를, 9일에는 네덜란드대대와 협조하여 610고지를 점령하였을 뿐 더 이상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2구간 도로를 개통하여 10일에 2차 공격의 마지막 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제72전차대대가 충격을 가하면서 단장의 능선 서측 문등리 계곡으로 돌입하여 북괴군을 유린함으로써 진지 교대차 남진하던 중공군 204사단을 분산시키고 적 후방을 교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능선의 동측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전 협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제9연대는 문등리 계곡 서측에서 병행공격을 실시하였다. 11일 미 23연대는 520고지를, 미 38연대는 905고지를 탈취하면서 미 2사단은 대부분 작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 23연대 3대대가 서쪽에서 851고지를 공격하고 1대대와 프랑스대대가 남쪽에서 주 능선을 따라 진출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13일 ‘단장의 능선 전투’ 최종 목표인 851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성공리에 작전을 종료하게 되었다.
적군 2만1000여 명, 아군 3700여명의 피로 ‘단장의 능선’ 확보...휴전회담 재개
약 1개월 동안 일진일퇴의 백병전을 거듭한 끝에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함으로써 전투가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탄약 69만 7000발, 항공기 출격 842회, 폭탄 투하 250톤이라는 엄청난 화력지원을 하였다.
또한 탱크를 이용해 충격을 가하는 기동전과 육박전에 이어 헬리콥터 작전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날에는 견고한 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사단은 사상자가 2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단장의 능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미 2보병사단 또한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단장의 능선’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생긴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지 9일 후,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여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을 재개했지만, 결국 다른 의제들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휴전회담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서 격전의 현장에 세워진 ‘비목(碑木) 비석’의 내용처럼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아까운 젊음들의 피만 부르는 고지쟁탈전은 1953년 7월까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