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심호흡] 정의선 시대의 현대차 노사관계, 역사의 격랑위에 올라타다
반자율주행 G80과 현대차 노조의 선택은 동전의 양면
전기차로 재편되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 내연기관차 근로자는 ‘직업 위기’
역사의 수레바퀴 되돌리려는 이상수 신임노조위원장이 ‘실리파’?
두 자릿수 임금인상보다 정년 연장 및 해외공장 국내유턴이 더 강경 노선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회사원 A씨는 최근 지방의 상가를 다녀오기 위해 지인의 차량에 동승했다. 그가 깜짝 놀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인의 차량은 ‘반자율주행’옵션을 장착한 G80이었다. 10년된 그랜저를 모는 A씨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을 체험했다. G80은 완벽한 반자율주행 실력을 발휘했다. 고속도로에서 최고 속도를 140km로 맞춰놓자 다양한 교통상황을 판단해 속도를 줄이거나 가속하면서 달렸다. 코너링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베테랑 운전자보다 부드럽고 속도도 빨랐다. 차선을 바꿀 때만 운전자가 핸들을 잡고 직접 운전했다. 차량이 이동수단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카피가 실감이 났다.
A씨가 체험한 신세상은 현대자동차 노조의 선택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이다. 한 뿌리에서 비롯됐다. 4차산업혁명의 가속화에 따른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3일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상수 후보를 새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다수 언론은 ‘실리파’가 ‘강경파’를 꺾고 당선됐다고 평가했다. 이 위원장이 그동안 노조활동을 통해 실리·중도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정의선 수석 부회장 시대의 현대차가 ‘강성 노조’라는 불확실성 변수를 해소하게 됐다는 기대 섞인 분석도 흘러나온다.
이런 관측은 본질을 놓친 예단에 불과하다. 전임자들은 ‘귀족 노조’라는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임금 투쟁’에 전념하면 됐다. 그 과정에서 파업도 불사했고, 평균연봉을 9000만원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 위원장의 앞에는 과거보다 더 수 십 배 이상 극단적인 상황, 즉 ‘생존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위원장의 핵심공약도 전의를 숨기지 않고 있다. 현행 60세인 정년을 61~65세로 연장, 해외공장의 국내 유턴(U-Turn), 조합원 고용 안정 등이다. 해외 생산물량을 국내로 돌려서라도 고용을 안정화시키고 더 나아가 정년도 연장하겠다는 스토리텔링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차 시장에서 자율주행차 및 전기차 시장으로 빠르게 이동함에 따라 기존 노동자들은 ‘직업 상실’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온건파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고강도 대응전략으로 평가된다.
정년 연장이나 해외공장 유턴이라는 공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사측과만 투쟁을 벌이는 게 아니다. 역사의 변화에 맞서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그 싸움은 현대차 노조 설립 이래 가장 격렬한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두 자릿수 임금 인상 등의 공약이 없다고 온건파라고 예단하는 것은 고정관념의 산물이다. 파업 카드를 동원해 높은 임금 인상을 관철시킴으로써 강경파로 낙인찍힌 역대 노조위원장보다 ‘노동의 종말’을 막아내겠다는 이 위원장이 훨씬 더 강경하다.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사건이 선행됐다. 하부영 현 노조위원장이 주도해 구성된 노사고용안정위원회는 지난 10월 현대차가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쪽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할 경우 오는 2025년까지 현재 생산인력의 40%까지 감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따라서 이 위원장은 앞으로 내연기관차 근로자라는 직업의 감축규모를 노사협상 어젠다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다. 과거의 협상은 배부른 협상이었던데 비해, 앞으로는 생존을 건 배고픈 협상이 진행될 참이다.
기본급 10% 인상을 요구하다가 5%로 깎아주고 생산라인에 복귀하던 시절은 차라리 낭만적이었다. 앞으로 생산라인의 40%를 감축해야 한다는 사측 제안을 받는다면, 어찌될까. 끈질긴 투쟁 끝에 감축 규모를 25%로 낮추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승리의 기쁨이나 환호는 없다. 회사를 떠나는 25%의 동료 및 선후배들 등 뒤에서 자신의 미래도 함께 걱정하면서 눈물지어야 한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이미 내연기관 근로자 대대적 감축
현대차, 4일 60조원 규모 '미래 모빌리티'청사진 발표
현대차 노사관계, 달리는 역사의 격랑 위에 올라타
이런 직업 상실의 공포가 현대차 노조원들에게는 두려운 미래이지만, 글로벌 완성차 기업 근로자들에겐 이미 뼈아픈 현실이다. 독일 최대 자동차 업체인 폭스바겐그룹의 고급차 브랜드 아우디는 지난 달 26일(현지시간) 2025년까지 9500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폭스바겐은 향후 5년간 7000명을 감원한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등도 내연기관 근로자의 대대적 감축안을 제시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1년 전인 지난 해 연말 직원 1만4000명을 퇴출시켰다. 닛산은 1만여명, 혼다는 3500명의 직원을 감원한다. 이들 기업들은 전기차 생산라인을 증설할 방침지지만, 퇴출된 노동자들을 위한 일자리는 아니다.
서구 완성차 기업들은 이처럼 시장변화에 따라 무자비한 생산라인 감축을 단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차는 다르다. 생산라인 감축은 물론이고 증설조차도 노조와 협의해야 한다. 내연기관 라인을 40% 감축하고 전기차 라인을 증설하는 게 현대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는 외길이지만, 그 길을 걷는 게 기술력만으로 담보되지 않는다. 노조가 동의해줘야 한다.
결국 현대차 노조가 선택한 이상수 위원장은 내연기관차 근로자들이 직면한 ‘노동의 종말’을 저지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셈이다. 과거에 어떤 길을 걸어왔든지 간에 앞으로도 온건노선을 걸을지는 미지수이다. A씨의 지인이 구매한 G80과 같은 반자율주행차 혹은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될수록 이 위원장은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강경투쟁을 벌여야 하는 구조에 처해 있다.
더욱이 현대차는 4일 향후 5년간 60조원을 ‘미래 모빌리티’에 투자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장기 혁신계획을 발표했다. 내연기관차에서 수소차, 전기차, 자율주행차, 개인용 비행체(PAV), 로보틱스 등으로 생산 역량을 이동시키는 한편, 인공지능(AI) 커넥티드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그룹을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정 수석 부회장의 원대한 구상이 빠른 물살을 타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 노사관계는 달리는 역사의 격랑위에 올라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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