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무역갈등과 홍콩사태는 한 뿌리의 지정학적 리스크
약자를 유린해 사익을 취하는 조폭 리더십 만연
‘글로벌 집단지성’은 실체 없지만 해법 될만해
[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시위대와 경찰 간의 유혈충돌로 치닫고 있는 홍콩사태는 최태원 SK회장이 최근 제기한 ‘위기론’과 직결돼 있다.
최 회장은 지난 1일부터 사흘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와 베이징대학교 등에서 열린 ‘베이징포럼 2019’에 개막 연설을 통해 ‘지정학적 불안정 심화’와 ‘과학기술 변화’를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양대 도전으로 규정했다.
미-중 무역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이슈가 세계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SNS), 인공지능(AI) 같은 첨단기술의 급속한 변화가 새로운 인류의 고민거리가 된다는 설명이다. 전자는 ‘현재 리스크’, 후자는 ‘미래 리스크’의 성격이 짙다.
홍콩 사태는 ‘현재 리스크’이다. 지난 11일 홍콩 경찰관이 맨손의 시위자를 향해 실탄을 발포해 중상을 입힌 사건은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를 인간적으로 증오하고 있다. 시위 지지자들은 총을 쏜 경찰관의 둘째 딸인 초등학생의 사진을 공개하며 그 위에 ‘나의 아버지는 살인자입니다’라는 글을 새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들도 친중과 반중으로 엇갈렸다. 반중파는 논쟁을 벌이던 친중 시민의 몸에 불을 질렀다. 이성은 실종되고 짐승만이 날뛰는 형국이다.
홍콩이 증오의 도가니로 변하면 한국경제는 직격탄을 맞는다. 미-중 무역협상의 악재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홍콩사태를 격화시키는 뿌리가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라고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 상품에 대한 천문학적인 관세부과 조치를 철회하지 않을 또 다른 명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 연말까지 예정대로 대중국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도 이에 맞서 대미 관세를 부과할 경우 저성장의 늪에 빠져든 한국경제는 발목을 잡아끄는 물귀신을 만나게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지난 4일 발표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 양국이 그동안 공표한 관세부과가 모두 실천될 경우 한국 경제성장률은 0.34%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1일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 목표치를 2.2~2.3%이상으로 잡았다. KDI분석대로라면 미-중 무역갈등이 격화되면 1.96%를 넘기 어려운 셈이다.
이런 지정학적 리스크의 해소방안은 뭘까. 최 회장은 ‘글로벌 차원의 집단지성’ 발휘와 공동 행동을 꼽았다. 근본 원인은 리더십 위기에 있다는 인식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집단지성이 해야 할 일은 지구촌에 만연해가는 ‘조폭 리더십’의 청산이다.
지구촌의 양대 강국인 미-중 무역갈등만 해도 그렇다. 원인 제공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폭 리더십’이다. 급성장해 온 중국 제품이 미국시장을 점령하자 천문학적인 보복관세를 부과한 게 도화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탓이라고 외치지만 그렇지 않다. 미-중간에 체결된 조약과 다져온 신뢰를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상대방을 무릎 꿇리겠다고 선언한 장본인이 트럼프이다.
트럼프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약자 앞에서 폭력적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지닌 힘을 도덕적 고민 없이 휘두른다. 중국이 기존 경제협약을 깬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중국기업의 침공으로 일자리를 잃고 수입이 줄어든다”는 선동적 구호를 트위터 등으로 날리면서 미중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원칙도 철학도 없이 상대방을 짓밟으면서 우리 편의 이익만 챙긴다.
한미방위비 분담금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연간 1조원대인 한국 측 분담금을 수백억원만 올리려고 해도 양국 간 협상은 진통을 겪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한국은 부자나라”라는 단 한마디를 던지고 무려 5조원대의 분담금을 요구할 태세이다.
이런 트럼프의 리더십은 빠르고 뜨겁지만 경박과 편견이 난무하는 SNS시대에 글로벌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다른 지도자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미국 앞에서 상대적인 약자인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몸을 낮춘다. 부당한 요구를 하는 트럼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거나 비난하기보다는 달래면서 문제를 풀려고 한다.
하지만 시진핑도 약자 앞에서는 트럼프와 비슷하게 군림한다. 홍콩에 대한 중국정부의 권위주의적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홍콩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있다. ‘폭도’는 역사적으로 불의하지만 힘센 자가 정의로운 약자를 유린할 때 동원되는 상투적 표현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대다수 참여자들이 폭도가 아니었듯이 홍콩 시위대도 폭도가 아니다. 하지만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은 지난 4일 시 주석을 만나 ‘재신임’을 받은 뒤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는 시 주석의 분신처럼 보인다.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돌연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소재의 한국 수출규제를 강화했다. 한국 대법원이 일제 전범기업의 위안부 피해보상을 결정하자, 이를 번복하라고 사실상 무력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의 눈에, 약자인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로 낙인찍어도 꺼릴게 없는 ‘만만한 나라’인 것이다. 미국이 약속을 깨고 코너에 몰아붙여도 끽소리 한마디 못하는 게 역대 일본 지도자들의 숙명같은 태도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한국 대법원의 사법적 판단을 문제삼아 한일경제관계를 결단 낼 기세로 위협하는 아베의 리더십 역시 조폭 리더십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처럼 2차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지도자들이 지향했던 인권과 민주주의, 협상과 절충이라는 가치관은 흘러간 유행가로 전락해버렸다. 지도자가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는 게 아니다. 지도자가 전쟁과 증오의 논리를 확산시킨다. 글로벌 경제를 위협하는 지정학적 리스크는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고, 해결의 실마리 찾을 기미도 없다. 그야말로 리더십 위기이다.
최 회장이 언급한 ‘글로벌 차원의 집단지성’은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지만 해법이 될 법도 하다. 2차세계대전 직후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문인들이 앙가지망(engagement.현실참여)운동을 펼쳤듯이, 이제 전 세계 지성인들이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약자를 위한 리더십’을 호소할 때가 됐다.